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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전문 방송 채널 J에서 2년 전에 방영했던 드라마 ‘루즈벨트 게임’은 당시에 매우 즐겁게 본 기억이 있다. 최근 채널 W에서 이 드라마를 다시 보여주고 있다. 예전에 내가 볼 때는 관심이 없던 아내가 요즘, 이 드라마에 빠지는가 싶더니 급기야 책을 구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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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호소카와 사장역을 맡은 카라사와 토시아키(唐澤壽明)의 매력이 한몫했던 게 아닐지. 잘생긴 외모에 혼신을 기울인 열연을 보고 나도 그의 팬이 되었다. 최근 채널 W에서 끝난 불모지대에서 이키 타다시 역을 보면서 다시 한번 그의 매력을 실감했다. 오키하라 역의 쿠도 아스카(工藤 阿須加)도 매력 넘치는 배우다.드라마를 통해서 이미 알고 있는 줄거리를 다시 책으로 읽어보니 또 다른 즐거움이 있다. 드라마로만 봤다면 모르고 넘어갔을 디테일까지 확인할 수 있었다. 또, 드라마에선 결코 말해줄 수 없는 아래와 같은 문장을 보는 즐거움도 있다. 아라이(新井)라는 이름은 거칠다는 동사 아라이(荒い)와 동음이의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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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오시마 제작소의 호소카와 사장은 회사의 차기 사장감인 사사이 전무를 제치고 회사에 스카우트되어 들어온 지 5년 만에 일약 사장으로 발탁된다. 영업부장으로 스카우트되어 뛰어난 실적을 올렸던 것이 회사를 창업한 회장 아오시마의 눈에 들었기 때문이다. 기업을 이끄는 수장은 안정(경리직)보다는 도전(영업직)을 높이 산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뽑을까. 사사이 전무는 일단 회장의 뜻에 수긍하지만, 철저히 호소카와의 경영에 의문을 제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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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의 아오시마 제작소 야구팀은 갈수록 전력이 떨어져 작년에는 감독이 에이스 선수 2명을 데리고 나가는 일까지 생겼다. 신임 감독은 고교야구에서 온 이름도 없는 이론가. 올해 성적도 뻔할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회사는 구조조정 바람이 불고 야구단 해체 이야기도 거론되는 실정이다.
프로 야구 선수와 달리 실업 선수들은 오전에는 회사 일, 오후에는 연습하는 반쪽짜리 야구선수다. 야구를 위해 1년 계약직으로 온 선수도 있다. 야구를 하다가 다치거나 계약이 끝나면 야구를 그만둬야 한다. 야구 통계학을 전공한 신임 감독 다이도는 철저한 데이터 기반 야구를 준비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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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오시마 제작소의 경쟁기업이자 자사 야구단의 라이벌인 마쓰와 전기의 반도 사장은 종합 전자 회사인 대기업 재패닉스 사장 모로타와 모의해 간교한 합병안으로 호소카와 사장을 현혹한다. 설상가상으로 거래 기업의 선납 요구와 거래은행의 경영 간섭, 회사 내 헤게모니를 쥐려는 파벌 간의 피 튀기는 싸움은 직접 기업을 해보지 않은 사람이라도 어렵지 않게 동감하는 부분이다.
갈등은 비단 기업만의 이야기도 아니다. 사내 야구팀도 라이벌인 마쓰와 전기와 경쟁하는데 안을 들여다보면 드라마적 요소가 다분한 악연이 얽히고설켜 있다. 고교 때부터 숙명의 라이벌이 된 오키하라와 기사라기, 전년도에 팀의 에이스를 빼돌려 함께 라이벌 회사로 간 무라노 감독, 부상을 숨기고 전전긍긍하는 만도 등 다양한 인간군상의 드라마가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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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케이도 준은 일본의 대표적인 베스트셀러 작가다. 대표작 ‘변두리 로켓’, ‘한자와 나오키’ 등 수많은 작품이 히트했다. 처음 그의 책을 읽었을 때 이전부터 그의 원작 드라마를 많이 봐와서 그런지 왠지 낯설지 않다. 은행원 ‘하나사키 마이(花咲舞)’ 시리즈 중의 ‘하나사키 마이가 잠자코 있지 않아(花咲舞が黙ってない)’도 재밌게 본 드라마다. 불의를 보고 참지 못하는 대사는 유행어처럼 인기를 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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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즈벨트 게임과 비슷한 풍의 이야기 ‘노사이드 게임(ノーサイド・ゲーム)’은 기업과 사내 럭비팀이 소재다. 현실적으로 사회적 붐을 일으켰다. 2019년 일본에서 아시아 최초로 럭비 월드컵이 개최되었다. 실력도 만만찮다. 최강 아일랜드를 꺾는 기염을 토했다. 예전 일본인을 비하하던 ‘왜놈’이란 표현이 무색하다. 책 중에는 쉬지 않고 읽게 만드는 책이 있다. 이런바 가독성 좋은 책이다. 그런데, 이런 종류는 대부분 한번 읽고 나면 금세 잊어버릴 정도로 진한 감동이 없는 경우가 많다. 내겐 (히가시노 팬에게는 미안하지만) 히가시노 게이고 같은 작가의 책이 그렇다. 쉽게 읽지만, 현실에 별로 와닿지 않는 줄거리와 억지로 맞춘듯한 구조 때문이다. 물론, 모든 작품이 그렇지는 않다. 내가 본 약 30% 정도가 그랬다. 다작하는 작가니, 실수도 할 수 있다지만, 신뢰하는 독자를 위해서 완성도가 없는 책은 세상에 내지 말아야 하는 것도 작가의 의무라 생각한다. 내 눈에는 지나치게 작위적으로 보이는데 출판사의 홍보 전략인지 히가시노 게이고 신작이 나올 때마다 붐이 일어나는 이유를 난 아직도 이해할 수 없다. 내가 보기에 이케이도 준은 다르다. 문장에 힘이 있어 쉽게 읽히지만, 허투루 쓰인 문장이 없다. 꼭 필요한 내용만 의미심장하게 서술한다. 아가사 크리스티의 대화체 문장 같다. 꼼꼼한 플롯은 앞뒤가 자연스레 이어지는 가치사슬을 형성한다. 은행원 근무 경험이 소설에 녹아 소재가 다양하다. 은행원의 일이란 계산기나 두드리는 책상물림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시장 상인의 일상에서부터 대기업 간부의 면모까지 간파하는 광범위하고 농밀한 직업이다. 책 제목 ‘루스벨트 게임’은 루스벨트 스코어 (Roosevelt score)에서 힌트를 얻은 것으로 야구 경기에서, 한 점 차이로 끝나는 경기를 말한다. 미국 32대 대통령 루스벨트가 했던 이야기 "8-7로 끝나는 야구 경기가 제일 재밌다." 에서 유래했다. 그런데, 알고 보면 세상의 모든 경쟁은 1mm, 한 수처럼 간발의 차이로 승부가 결정된다. 스포츠 경기는 당연하고 바둑은 한 수가 모자라 대마가 잡힌다. 기업은 입찰에서 근소한 차이로 고배를 마시고, 부동산 경매는 상대보다 1원이 적어 낙찰받지 못한다. 종이 한 장 차이로 승부가 결정되는 것이다. 이러한 경쟁에서 엎치락뒤치락하며 역전에 역전을 거듭하고 접전을 벌이는 기업과 야구 이야기는 몰입할 수밖에 없다. 비록 소설이지만, 현실 깊숙한 곳의 핵심 키워드가 소재다. 주변에서 언제라도 일어날 법한 사건들을 다루니 관전자인 독자는 책에서 손을 뗄 수가 없다. 이케이도 준을 몰입하며 보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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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로 책 제목을 유심히 본 사람이라면 알 수 있겠지만, 원작 ‘루즈벨트 게임’이 한국 외래어 표준법에 맞춰 ‘루스벨트 게임’으로 나왔다. ‘루즈벨트’는 일본식 영어다. 한국 외래어 표준은 ‘루스벨트’다. 원어인 영어 Roosevelt의 발음기호는 [róuzəvèlt]이며 읽는 소리로 읽으면 ‘로우즈벨트’ 가 된다. 대부분 형편없는 일본식 영어를 생각할 때 ‘루즈벨트’는 한국 외래어 표준어 ‘루스벨트’와 비교되어 모든 것은 내 것이 우월하다는 의식을 되돌아보게 한다.채널 W